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 카뮈 (문단 편집) == 생애 == [[프랑스령 알제리]] 태생이라는 사실에 알제리 아랍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알제리 및 [[이슬람]]계와는 관련이 없다.[* 알제리계 출신으로 유명한 프랑스인은 [[지네딘 지단]]이 있다. 아버지가 [[알제리 전쟁]] 당시 아르키(Harki)라고 불리던 친프랑스 알제리 민병대원 출신으로 용케 프랑스로 이민 온 항만 노동자였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단순 [[식민지]]가 아닌, 프랑스의 확장된 영토로 취급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 [[피에 누아르|본토로부터 새로운 땅에서의 기회를 노리고 이주]]한 [[프랑스인]]들이 많았으며, 카뮈의 아버지나 어머니[* 카뮈의 어머니는 [[1882년]] 알제에서 태어났는데 부모가 [[스페인 왕정 복고|스페인 왕국]]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스페인인]]이었다. 카뮈는 [[스페인]]을 혈통에 의한 자신의 제2의 조국이라 칭한 바 있다.]도 그 중 일부였다. 카뮈가 태어날 당시의 알제리는 그저 프랑스라는 국가의 한 지역이었고, 따라서 그는 프랑스 태생이었다. 카뮈가 알제리 태생이라는 말은, 카뮈가 사망(1960)한 후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1962)한 현재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알제리는 1962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하나의 독립 국가로 존재한 적이 없었고, 유사 이래 항상 특정 국가의 일부로 존재했던 지역이다. 쉽게 말해 프랑스는 알제리라는 '국가'를 병합한 게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알제리라는 '지역'을 자국 영토로 편입한 것이다. 알제리는 국가 상태에서 프랑스에 병합당한 게 아니고 국가였던 적도 없었기 때문에 카뮈가 살았던 당시 기준에서는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계 알제리인', '알제리계 프랑스인' 같은 말은 모두 없었다. 게다가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나 보호령이었던 모로코 등과 달리 알제리는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본토의 행정망이 그대로 이식되었다. 이것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 우파가 알제리 독립을 반대한 논리 중 하나였다. 카뮈는 그냥 프랑스의 알제리 지방에서 태어난 프랑스 태생 피에 누아르(Pied-Noir)였다.] 즉,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순수 [[프랑스인]]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가령 그의 대표작인 [[이방인(소설)|이방인]]이나 [[흑사병(소설)|페스트]]는 배경이 각각 현재 알제리의 도시인 [[알제]]와 [[오랑]]인데, 작품 내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이방인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비중으로 나오는 [[아랍인]]들을 제외하고 전부 [[프랑스인]]이다. 카뮈가 인물 설정을 이렇게 한 이유는 결국 알제리도 프랑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이다. 배경이 프랑스이니 등장 인물도 프랑스인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게다가 당시 알제리의 대도시들은 전부 프랑스계, [[유럽]]계가 주류였고 [[아랍]]계가 비주류였다. [[흑사병(소설)|페스트]]에서는 첫 장부터 '''오랑 시는 프랑스의 한 도청 소재지에 불과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알베르 카뮈 전집을 번역한 김화영 교수에 의하면, 프랑스 현지에서 유학할 당시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어 사전(불불 사전)에 예문으로 카뮈의 문장이 다수 실려 있었다. 이는 카뮈가 사용한 프랑스어가 표준 프랑스어에 적합했다는 뜻이다. 알제리는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넓은 대국이지만 지리적 연유로 도시들은 [[지중해]] 연안에 집중돼 프랑스 식민 지배의 영향으로 집중 개발되어 있었고 내륙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데, 카뮈 역시 프랑스 본토와 가까운 연안 지역에서 태어난 인물이고 부모도 프랑스어를 쓰니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습득할 환경은 프랑스 본토인들과 차이가 없었다. 현재 알제리의 공용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는 당연히 할 줄 몰랐다.] 현재의 알제리 [[아랍인]]과는 거의 무관한 인물이다. 카뮈는 아버지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사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엔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모친은 남편 사후 카뮈와 형을 데리고 친정에 들어간다. 모친은 문맹에 청각 장애를 가진 하녀였고, 카뮈는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외삼촌 두 명과 함께 살았다. 가난으로 중학교도 못갈 뻔 했는데 초등학교 담임이던 루이 제르맹 선생님이 집으로 모친과 할머니를 찾아와 진학을 해야한다고 설득하고 매일 카뮈를 붙잡고 교육시켜 중학교를 장학금을 받고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카뮈는 1957년 노벨상 수상 후 연설문인 '스웨덴 연설'을 '어머니 다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제르맹 선생님에게 헌사한다. 그리고 카뮈는 고등학교에서 평생의 스승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를 만난다. 그르니에는 당시 생계를 위해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고 중년 이후에는 소르본 대학교의 미학, 예술학 교수가 된 철학자, 작가이다. 그르니에의 제안으로 카뮈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르니에의 산문집 '섬'이 알려져 있다. 카뮈의 '섬' 서문에는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는 유명한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 두 사제는 카뮈가 죽기 전까지 30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편지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 고백이 넘쳐난다.[* 이들의 서한집도 번역되어 있다.] 카뮈는 학생 시절에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고질병인 [[결핵]]이 방해가 되어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자동차 수리공 및 신문사 인턴 기자, 가정교사 같은 여러 일로 벌어먹으면서 철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22살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하여 좌익사회운동을 했으며 프랑스측의 알제리 식민지배에 부정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고, [[베르베르]]족으로 흔히 알려진 이마지겐 부족에 대한 프랑스의 억압과 더불어 아랍계들의 차별도 고발했다. 그 때문에 정부의 압력으로 일하던 신문사에서 해고당하자 이에 언론인 노조가 반발하면서 시위를 벌여 결국 복직한 일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카뮈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여 대표적인 저항 언론지인 콩바에서 편집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나치 점령에서 해방되자 과거를 잊고 관용과 용서를 베풀자는 주장에 맞서 반역자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부역 지식인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층은 논쟁으로 들끓었다.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층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대표적인 논전은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정의론의 격돌이었다. 모리아크는 과도한 숙청을 우려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학살자와 희생자라는 쳇바퀴보다 더 나은 것을 바란다. 그 어떤 대가를 치른다 해도 [[프랑스 제4공화국|제4공화국]]이 게슈타포의 장화를 신어서는 안된다." 이에 카뮈는 이렇게 맞섰다. "비록 인간의 정의가 너무나 불완전하다고 해도, 인간의 정의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는 정직함을 필사적으로 견지함으로써 그 불완전함을 교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소위 [[나치]] 청산이란 구실로 광범위한 숙청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는 부역 혐의자가 제대로 된 절차나 재판도 없이 임의로 처형되기도 하고 각종 징계나 불이익등 [[사적제재|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자 경악하여 이를 크게 규탄했다.[* 프랑스의 소위 나치 청산 과정에서는 추악한 무리수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점령군 치하에서 단지 생존을 위해 독일군에게 몸을 판 여자들을 화냥녀라 하며 광장 한복판에서 머리를 박박 밀고 돌을 던져댔다.] 때문에 [[샤를 드골]]이 허겁지겁 이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카뮈는 이런 무분별한 폭력뿐만 아니라 드골이 법적으로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는 일에도 일부 반대했다. 문학가이며 언론인인 로베르 브라지야크가 나치에 부역한 죄로 처형될 때 프랑스의 문학가들이 탄원서를 쓰며 브라지야크의 처형에 반대했고 카뮈도 이에 참여했지만 드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지식인은 브라지야크의 사면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